Drawing 32
전보경
이웃의 미학
Jun Bokyung
The Poetics of Neighborhood
전시기간: 2012.4.20-5.19
오프닝: 4.21.6pm
전시장소: 테이크아웃드로잉 이태원동
전보경_이웃의 미학, 네온, 2012
이웃의 미학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알게된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오프닝 공연과 워크숍이 있습니다.
#1 이웃들의 오프닝 공연: 4.21.7:30pm
이연경(보컬),이준호(기타),민지선(피아노)
#2 워크숍_세상을 바꾸는 비누: 5.10.2:00pm (진행 Esmey 핸드메이드 비누가게)
전시장소: 테이크아웃드로잉 이태원, Bread & Coffee (커피+베이커리), 외국 책 (중고서점), Esmey (핸드메이드 비누),손뜨개 아주머니의 집,제일시장,삼각주 형태의 숲,C-Lover (카페-현재 없음),돗자리 (디자인),The Bakers Table (베이커리+음식),Monster cupcake (컵케익), Hattori Kitchen (이자카야),미가원 떡 집 (현재 없음),폴란드 그릇 노바 (그릇가게),돼지 문방구,Happy Store (미제가게),Longing (바),Bin Modiste (모자가게),Thai Noodle (음식점),감정원 (점),KC Philippine (필리핀 음식+식료품),Book (서점),a cube gallery (갤러리)
***전보경 작가의 레지던시 여정은 홈페이지 Cafe Residency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전시는 2월 초부터 시작된 이태원동에서 작가의 이웃찾기이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작업의 방향은 그들을 만남을 통해 진로를 찾아갔다.
나는 그들과 새로운 교한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자본주의가 문제점을 드러낸 현재 우리는 화폐를 통하지 않고 교환을 하고자 한다. 과거의 방식인 물물 교환은 믿음이 바탕이 된 한사람의 이득이 아닌 쌍방의 필요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새로운 이태원동 이웃들과 믿음을 바탕으로 한 만남을 통해 그들의 생활의 터전을 그림에 담고 그것을 그들이 측정하는 가치의 양에 따라 그들의 물건과 교환을 하고자 한다.
관객들은 이웃의 미학 전시에서 (전시 오픈과 함께 서서히 다른 물품으로 바뀌어질) 드로잉과 이웃들에게 받은 물건들, 그리고 나의 이웃만들기의 노트인 책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전보경_일상적 사건이 이 세상에 대한 이해와 아름다움으로 이끈다.The ordinary events lead to the beauty and the understanding of the world, 건물 외벽에 페인트, 2012
작가노트
나의 이웃의 미학은 걷기로 부터 시작한다.
길을 걷다 멈추고 머뭇거리며 흘끗거린다.
누가 나의 이웃이 되고자 할 것이며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수 있을까?
역사라는 것이 지식과 정치라는 상부와 외부에서 온다면,
이야기는 하부와 내부에서 매 순간마다 만들어진다.
도시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트루바두르이고자 한다.
우리는 경험하는 모든 것들과 의미를 다른 사람을 통해
다시 습득하고 습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안보이는 실로 연결 된 과거 현재 미래를
오랜 시간 살아 온 사람들,
지금 이사 온 사람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
단 한번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겨 두려한다.
도시는 돌고 돈다.
작업실 한 구석에 매달려 있는 노란색 후리지아 바구니 옆집 꽃가게에서,
비누가게의 선반에 놓여져 있는 커피잔은 삼거리 그릇가에서,
허머스와 찍어 먹는 빵은 대로의 빵집에서.
도시는 생성하고 소멸한다.
문을 열지 않던 곳에 누군가 빨간 페인트를 칠하고,
창가에 반짝거리던 크리스마스 전구에는 더이상 빛을 내지 않고,
이웃은 사라지고 그 곳에 새로운 이웃이 들어온다.
장소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장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통해 그곳을 기억하는 보이지 않는 관계이다.
함께 있어야 함은 어떤 목표를 달성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아닌 너가, 너가 아닌 내가 함께 있어야 함은 함께 할 수 없음을 함께한다는 데에 있다.

전보경_보이지 않는 이웃(용산 미군 부대에 관한 설문), 15개 적동판, 2012
관계예술
전보경 작가는 이태원 동(녹사평, 해방촌) 사이를 돌아다니며, 이웃과의 관계 맺기를 통하여 도시의 지역성을 탐구하고 이웃들과의 교환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추적한다.
지역에 대한 정체성의 탐구는 지정학적 위치와 같은 지역조사와 사건이 발생한 역사적 기록으로 만 평가되는 것이 아닌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이다. 서울시의 주 사업으로 시작된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과 용산공원을 통한 녹지축의 형성은 그 지역의 갖는 정체성을 지대의 시가와 용적율로 단순 평가해 버리고 자생적으로 형성된 지역의 내부 구조를 간과해버린다.
80년대 명동을 시작으로 압구정–청담–가로수길에 이어 최근의 핫스팟으로 불리는 이태원 지역이지만, 최근 가로수길이 많은 유동인구의 유입에 따라 자생적으로 증식하던 특수성을 가진 소규모 상점들이 사라지고 대기업 SPA브랜드와 대형 커피프랜차이즈에게 그 자리를 내어준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획일화 된 개발의 방식이 그 지역의 특수성을 어떻게 소멸시켜 가는지 짐작 할 수 있다.
전보경 작가가 직접 이웃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행위는 명함과 브랜드 대표되는 현대 소비의 방식을 얼굴을 마주하고 사람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누군가에게 물건을 판매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 진실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물건을 사기 위해 내가 아는 누군가를 한번 더 기억 할 수 있는 방식이 된다.
전보경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하여 작가의 잉여적 생산물인 드로잉을 옆의 누군가(이웃)에게 전달하고 그에 해당하는 물건을 받아다 또 다른 누군가(관객)와의 교환을 시도한다. 자본주의의 태생이 잉여적 산물을 서로 필요에 의해 교환하는 것이었다면, 이번 시도는 현재 자본의 목적이 화폐와 digit으로 이루어진 매개물로의 전도가 아닌 그 본질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전보경_Common lights_이웃에게서 빌려온 불빛_가변설치_2012
비지니스 사회
: 현재 시행중인 교환의 가능성과는 다른 가능성을 암시하는 인간관계의 공간을 위하여*
누구나 한번쯤 명함카드가 없어 곤란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Microsoft사의 초대 엔지니어 였던 토마스 스타이거는 다니던 회사를 사직하고 열정적으로 시작한 새로운 사회운동 시기를 떠올리며 TED의 강연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이전까지는 단 한번도 그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지를 못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누구이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과연 어떤사람인지, 어떻게 대답할지를 모르겠더라구요.”
지역의 거주자Residents가 되기 위해 6개월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루시 리파드Lucy R. Rippard의 의견에 비해 그의 거주Residency 기간은 아직 진행중이다. 건물 공사 현장을 뒤로 하고 남산 언덕 자락을 오르내리며 제가 여기에서 살기 시작할 거에요라고 문을 두드리며 얘기하는 작가의 태도가 이것의 시작이었다. 스스로 ‘이웃을 만들겠다’ 한 것이 아니다. 이웃이라는 용어를 자주 듣고 얘기하면서 어느새 일상어가 되어버였긴 하지만, 언젠가 다른 사람의 물건을 들고 작가에게 주었을 때, ‘아 그 사람은 OO씨의 이웃인가요?’ 라는 작가의 물음은 그래서 참 낯설었다. 이웃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처럼 실체가 없는 추상의 한 카테고리 이기 때문에, 아영씨, 정원씨도 아닌 비 구체적인 누군가의 개인 또는 집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작업을 들어 ‘관계적 예술이다’ 라고 쉽게 정의 내리지 않기로 했다. 비 구체적인 무언가를 논의하기란, 그리고 그것을 재현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로 갖지 못하는, 일상을 특별하게 하는 순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전보경의 작업은 그러한 면에서 일상적이다. 일상이 예술이 되고, 누구나 다 예술가이다라고 명한 지 50년이 넘었지만, 지금처럼 일상적인 것은 없다. 바에 샹들리에로 걸린 오나먼트를 사용하여 텍스트를 구성하고, 사탕 포장지의 엷은 막으로 창문을 덮는다.(사실 사탕 포장지는 곤잘레스 토레스의 유명한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전시장으로 구성되는 건물의 내부 또한 마치 원래 그랬던 것 만큼 일상적이다. 사각지대인 계단의 아랫쯤은 이름 모를 누군가의 물건들이 자리하고, 창문 옆 거울은 원래 있던 벽처럼 반짝반짝 빛이 난다. 원래 드로잉의 성격이 그렇지 마는, 있는 듯 없는 듯 한 컬러 색채와(대조색을 사용하여 가시성을 높이는 디자인 색채군은 그 반대이다) 수많은 레이어를 사용하여 일률적이고 정확도를 자랑하는 드로잉의 현대화를 겪은 사람이라면, 마치 벽에 아무렇게나 적당히 붙어있는 듯한(그것이 부착된 위치는 지정학적으로 위치한 건물들의 실제 위치에서 비롯한다.) 모습은 정확한 무언가를 전달 하기 보다는 나의 이웃을 항상 보면서도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익명성을 상징한다. 어느 한 면에서 그의 작업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큐레이터인 니콜라스 부리요Nicolas Bourriaud의 관계적 미학의 행보를 아주 정확하게 따르는 듯 하다. 1998년에 프랑스어로 출간되어, 2002년 영문으로 번역됨에 따라 1990년대 말에 시작된 일련적 관계적 미술을 추구하는 작가군들의 특징을 새로운 태도로 분석하며, 미술학계와 현장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미술학적 분류지를 토대로 지역적이고 태도적인 이러한 성격의 예술이 반대로 탈 지역적이고 현상적인 지금, 오늘 여기에서 어떻게 되돌아 오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미술사적 사례연구로서 필수적이면서 흥미롭다.
전보경이 <이웃의 미학>전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작업의 방향은 그러한 면에서 부리요의 저서 <관계의 미학>에서 나타난 특징과 닮아있다.
첫째는 물질 적인 형태에 대한 것이다. 이웃을 나타내는 요소가 되는 그의 드로잉은 작가의 시간을 통해 생산한 물질 적 요소이나, 그것의 형태는 작가성을 아주 크게 담아 아우라를 생산한다거나 유물적 방식을 취하는 형태로 유리관 내부에 갇혀 ‘만지지 마시오’라는 무언의 어구를 전달하지도 않는다. 소비주의 시장경제에서 일상적 소비재를 예술의 아우라로 경험했던 현 세대이기에 아우라가 제거된 일상은 더 보잘 것 없는 유색 무취의 감정을 경험하게 한다.
그것은 스펙터클이 끊임없이 재 생산되는 근대사회에서 이미지의 과잉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것은 예술 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것들이 자본의 수용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과잉 형태를 띄기 때문이다.

전보경, 이웃의 미학: 이태원동, 이웃과의 교환을 위한 22개 드로잉(그리고 교환물은 다시 관객들의 참여로 순환되고 교환되어질 예정이다.), 설치전경, 2012
상호적이며 상생적이라는 그의 두 번째 특징은 단지 물질적 측면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이웃과 이웃 사이를 지나 다니며 그녀가 발견한 보이지 않는 흐름은 파란 물줄기와 같은 동그라미 타원 상징화 되는 어쩌면 용산 바닥에 지나고 있다는 물줄기의 흐름일 수도 있다. 옆의 빵집에서 사온 빵으로 화이타를 만들고 이 음식점도, 그 옆 주점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리 눈물 방울 조명기구를 천정에 매달아 둔다. 내가 너에게, 그리고 다시 너가 나에게 보답하는 형태가 되지 않아도, 나는 이 집에서, 그리고 내 것은 다른 집으로 자취를 옮긴다. 어느 상점의 그릇은 여기에도, 허브샵에서 만든 비누가 다른 가게에도 있는 모습은 나의 이웃들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발견 해 낼 수 있는 소박한 웃음이다. 이러한 소박한 행동들이 바로, 여기서 일어나고 있다. 내가 이 사람과 이웃을 만들어 주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이러한 이웃이 있다고, 그것을 말하고 있다. 마치 붉은 실처럼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그 틈 사이를 부유하며, 사람 사는 얘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소식을 통해 함께 공동의 것을 이야기한다. 그가 처음부터 원한 것은 그러한 고리의 회복이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작업을 재현하는 방식은 모두 그들에게서 온다. 그가 쓴 전시의 알림은 시집을 읽고 감동받은 운문 형태이고, 지웠다 쓰기를 반복하는 것은 공중파 촬영에도 소신 있게 당당한 음식점의 메뉴판에서 배운 것이다. 하지만 상품화 될 수 없는 것이 처음부터 사라질 운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기 때문에, 상품이 되지 못하고, 로고에 의해 포장되지 않는다면, 인간 사이의 관계는 극단적이거나 은밀한 형태를 취해야 한다(Nicolas Bourriaud, 13).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작업은 사라진다. 자리는 비워지고 그 자리는 누군가의 다른 사물로 지속적으로 채워진다. 눈에 보이지 않던 너와의 교류를 수면으로 꺼내는 것이 이번 작업의 시작 점이자 마지막 점이다. 누구든, 당신이 원한다면, 이 교류에 참여할 수 있다. 당연하다 여겨지는 교환의 자본주의 적 형태 없이 교류가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이웃과 내가 맺는 관계임을 다시금 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가 얻은 것은 이웃 그 자체가 아니다. 이웃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그것은 지식사회라는 표어 아래 놓치고 있는 노하우Know-How의 문제이다. 현재의 물질주의 방식은 노우-왓Know What의 태도로 학위와, 자격증에 쫓은 지식의 측면만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장인이 갖는 경험의 축적이 차이를 만드는 오늘의 틈새이다. 부리오가 말한 ‘틈’은 바로 이러한 예술의 사회적 틈새가 경제적 영역에서 인용하는 틈새시장으로의 도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정재임(전시기획)
* 참조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관계의 미학>, 미진사, 서울: 2011, 26

전보경_우리는 보이지 않는 테이블 사이에 앉아 있다_미러 아크릴과 크리스털_가변설치_2012